슬램덩크라는 만화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중학교 시절 슬램덩크라는 만화에 푹 빠지면서 격주로 학교 앞 서점에 들러 소년챔프를 보기 위해 줄을 섰던 기억이 있다. 슬램덩크를 통해 농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연스레 미국프로농구인 NBA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 당대의 슈퍼스타 이외의 선수들을 알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내가 중3이었던 1993년,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는 영원한 라이벌(?)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 선즈를 누르고 NBA 파이널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고 조던은 다음 해 은퇴를 한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 된 1994년, 용돈을 모아 구입해 본 농구 잡지를 통해 알게 된 한 명의 선수. 몸에는 문신이 있고 머리는 컬러풀하게 염색을 하고 얼굴에는 안면보호 마스크를 착용한, 평범하지 않은 한 명의 선수, 그가 바로 데니스 로드맨이었다. 93-94 시즌,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트레이드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그의 과거 디트로이트 시절 커리어가 함께 기재되어 있었다. 리바운드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기록에 나는 로드맨이라는 선수에 흥미를 느꼈고, 그 해 미술전시 작품도 데니스 로드맨의 그림을 그려서 출품하게 된다. 이렇게 로드맨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의 소속팀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티셔츠를 구입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고,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NBA 중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로드맨이,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의 모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디트로이트 시절이나 댈러스 시절이나 변함없이 보여주는 공에 대한 집념
고2였던 1995년에는 마이클 조던이 시즌 중반 등번호 45번을 달고 코트에 복귀를 하며 내게 즐거움을 주었고, 로드맨의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웨스턴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하킴 올라주원의 휴스턴 로케츠에 패해 NBA 파이널 진출이 무산되는 슬픔을 주었다. 그리고 95-96시즌을 앞둔 10월 로드맨의 시카고 불스 이적 소식을 듣게 된다!!!! 정녕 마이클 조던과 로드맨이 함께 뛰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슬램덩크가 연재되기 시작한 1990년에 로드맨은 머리를 염색한 적도 없는 파란색 유니폼의 디트로이트 소속이라는 것이다. 강백호는 로드맨의 머리 염색과 95년 불스로의 이적을 예상이나 한 것처럼 빨간 머리에 빨간 유니폼을 입고 있다.) 시카고 불스로서도 94-95시즌에 신흥 라이벌 팀으로 급부상한 올랜도 매직으로 이적한 호레이스 그랜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로드맨이 훌륭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이클 조던, 데니스 로드맨, 스카티 피펜의 시카고 불스가 95-96시즌을 열었고 이 시즌을 보며 나는 고3이 되었다. 95-96시즌은 시카고 불스의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는데 여기에 매직 존슨의 LA 레이커스 복귀는 나를 더욱 NBA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시즌에 시카고 불스는 72승 10패라는 NBA의 역사를 새로 쓰면서 당당히 파이널에 진출한다.(시카고 불스 72승 기념 티셔츠도 구입해서 입었던 기억이...) 파이널에서는 숀 켐프와 게리 페이튼의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만나 4승 2패로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대입을 앞둔 96년 겨울에 시작된 96-97시즌 역시 69승 13패라는 호성적으로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다.(사실 96-97시즌 불스의 경기는 많이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대학생이 되면서 NBA 중계를 해주던 아침~오전 시간에, 전날 음주로 인한 수면 상태였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_-;;) 97-98시즌 드디어 시카고 불스는 다시 한 번 NBA 파이널 3연패의 금자탑을 세운다. 98년 유타 재즈와의 파이널 최종전이었던 6차전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경기가 아닐 수 없다. 이 경기는 내가 군입대 전 마지막으로 본 NBA 경기이기도 하다.(98-99시즌은 선수노조의 파업으로 인해 99년 2월이 돼서야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다.) 조던과 로드맨은 97-98시즌이 끝난 후 은퇴, 피펜과 스티브 커, 룩 롱리는 이적을 함으로서 90년대 NBA 3연패를 두 번(총6회 우승)이나 했던 시카고 불스 왕조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내가 군복무를 하던 99년에는 로드맨이 LA 레이커스를 통해 코트 복귀를 했으나 단 23경기만을 뛰고 방출되었으며, 2000년에는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12경기를 끝으로 NBA 코트를 떠나게 된다.
경기가 끝난 후 자신의 유니폼(신발)을 아이에게 건네주는 로드맨
(마지막 댈러스 시절을 잘 보세요ㅋ)
대학시절
61년 생인 로드맨은 세 살때 아버지를 잃고, 대학농구 여자대표를 지낸 두 누나의 영향으로 고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했지만 농구보다는 공항에서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이 후 텍사스에 위치한 쿡 카운티 2년제 대학에 진학했지만, 농구선수로의 진로를 결정한 후 사우스 이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Southea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 NAIA)으로 편입했다. 남들보다 늦게 농구를 시작한 만큼 농구에 몰입한 로드맨은 ‘한 번 높이 뛰어오르기보다 여러 번 자주 뛰어 오른다.’라는 신념으로 리바운드에 두각을 보이기 시작한다. 첫 경기에서 19개의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자신을 알렸고, 대학 시절 3년간 평균 25.7득점, 15.7, 야투 성공률 63.7%를 기록하는 등 두 번의 득점왕, 한 번의 리바운드왕을 비롯하여 3년 연속 NAIA 올 아메리카 선수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대학시절의 로드맨
코트를 떠난 후에도 북한을 방문하는 등(김정은이 로드맨의 찐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의 돌발 행동으로 종종 기사화 되는 로드맨이지만 사실 그런 것들에 나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나는 코트 위에서 1개의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수차례 뛰어 오르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공을 잡기 위해 몸을 날리고, 경기가 끝나면 유니폼을 관중석에 있는 팬들에게 던져 주고, 가끔씩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여주던 로드맨의 모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중-고-대학생활을 함께한 90년대의 NBA를, 로드맨을 중심으로 추억하며 적어 보았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다소 긴 글이 되어버렸지만 아래, 시즌별로 정리를 하면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다음 로드맨에 관한 글을 주문한 엔터베이의 로드맨 피규어가 도착하면 쓰게 되려나? ㅎㅎㅎ
Dennis Rodman 2/6 (Detroit Pistons) 에서 계속
이미지 출처: google, gettyimage, youtube, 개인소장자료
참고 싸이트: http://www.basketball-reference.com, http://fun.jjang0u.com/articles/view?db=311&page=10&no=170, http://blog.naver.com/qsohn/40057115569